모든 일과 현상에는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세상 그 어떤 일도 원인 없이 갑자기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일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마 우리 인간이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걸까' 밖에 없을 것이다.
개발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나는 '왜'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왔다. 이 블로그에서도 '왜'에 대한 사고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고, 일상생활에서도 '왜'와 관련한 생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왜'는 왜 생각해야 할까. 오늘은 나와 '왜'의 길고도 짧은 여정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내가 처음으로 '왜'를 생각하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는 어떤 새로운 외부강사님을 초청해 '논술'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당시 그 수업을 참 좋아했다. 강사님이 늘 충혈된 눈에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여서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늘 설득당했었기 때문이 가장 컸다.
솔직히 중학생들이 학원에 가봐야 얼마나 선생님들 말을 잘 듣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겠는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뭔 새로운 논술 수업을 들으라고 하니 '학원을 더 가야 돼?'라는 생각부터 났던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 시간에 친구들과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거나 집에서 만화책을 읽는 시간을 더욱 원했다.
처음 수업을 들으러 간 날,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눈이 시뻘건 아저씨가 우릴 반겨줬다. 그리고는 약 1시간 정도의 수업시간 동안 그냥 우리와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다음 주부터는 수업에 오기 싫은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면 수업에 오지 않아도 된다.' 라는 말로 수업을 마쳤다.
어린 나에게 그 첫 수업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보통 학원 수업이라 하면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2분 내외로 진행하고 바로 책을 펴고 강의가 진행되었던 것이 기본인데, 이 선생님은 자기소개와 이야기로만 1시간을 다 써버리더니 이제는 수업에 오기 싫으면 오지 말란다. 그날의 수업 자체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당연히 나와 친구는 다음 주에 수업에 가지 않았다.
그다음 주가 되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왜 수업에 오지 않았는지'를 물어봤다. 우리는 '게임이 하고 싶어서 게임을 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런 건 명확한 이유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왜 게임을 하고 싶은 것은 타당한 이유가 아니며 , 그렇다면 나와 친구는 '왜 수업에 오지 않았을까'에 대한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논리적인 설명에 홀리듯 빨려 들고 있었고, 그 선생님은 이런 말로 우리에 대한 훈계를 마쳤다.
여러분은 저를 개, 돼지 정도로 생각하는군요
우리가 크게 당황하여 죄송한 모습을 보이자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말 죄송한 게 맞냐고 물었다. 우리는 다시금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번엔 '왜 죄송한지'를 물었다. 그때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수업을 안 가고 게임을 한 게 죄송한 건지, 아니면 그냥 게임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궤변을 당당히 늘어놓은 게 죄송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선생님이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 게 죄송한 건지. 쉽게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선생님이었다.
여러분이 쉽게 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떤 행동을 '왜' 했을까? 에 대한 답은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찾는 방법을 여러분에게 가르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방금 같은 궤변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아직도 그 선생님만큼 말을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나와 친구는 매주 그 논술 수업시간만을 기다렸다. 선생님의 설명에 빠져 수업을 듣다 보면 1시간이 10분처럼 지나갔다. 살면서 그 어떤 수업을 듣고, 누구의 강연을 들어도, 그 사람만큼 몰입감 있게 시간을 이끌어가던 사람과 수업, 강연은 아직 없다. 그리고 그가 행하던 가르침의 가장 근본인 '왜'를 납득시킬 수 있는 사고법을 늘 이끌어가고자 했다. '왜'를 생각하면 '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사고에 깊이가 더해진다. 깊은 사고를 통해 추론해 낸 결론은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인을 납득시킨다. 다시 말해, '왜'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은 사고력을 키워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커뮤니케이션에서의 힘을 증가시켜 준다.
문제는 내 주변환경이 이런 '깊은 사고'를 허용치 않았다. 학교는 거의 정글과 다름없었다. 거의 매일같이 '누가 누가 더 병신인가'를 겨루듯이 다퉜다. 친구들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함께 하자고 할 때, '왜 그런 걸 해야 하지?'를 물었다가는 한 순간에 찌질이 겁쟁이로 낙인찍혔다. 학원에서는 내 머리에 정보를 주입해 넣기 바빴다. 설상가상으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던 그 논술 수업은 수강생이 많이 모이지 않아 몇 달 만에 폐강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당연히 더했다. 입시를 준비해야 하니까. 첫 대학 입시를 앞두고 논술 학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화려한 입시 이력을 설명하던 선생님은 대학의 입맛에 맞춘 글을 쓰는 방법론만을 설파할 뿐, 사고를 깊이 가져가는 사고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선 그런 식의 교육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구조는 지금 그렇다. 학생들이 '생각할 능력'을 기르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의 사고력을 죽이기 바쁘다.
뭐, 대한민국의 교육에 관해서는 여기서 더 언급해 봐야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만하고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야겠다.
이런 일련의 사고력 죽이기 과정을 거치고 대학에 입학한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들 간의 쌍방향 교육이 진행되겠지?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토론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거야.
당연하지만 개소리였다. 대학은 고등학교, 중학교, 학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교수는 지 할 말만 하고,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 적는다. 신물이 났다. 일종의 혐오감마저 느껴졌다. 평생을 그런 식의 주입식 교육을 견뎌왔다. 대학이라는 곳에 가면 좀 더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기대하며. 그런 기대가 정말 와장창 깨졌다. 한 학기 만에 휴학을 하고, 나는 '이 시스템에 내가 맞춰야겠다' 싶었다. 왜를 물어보는 나를 무슨 예의 없고 눈치 없고 건방진 사람처럼 쳐다보는 시선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바엔, 나도 생각하기를 멈추고 우리 안의 원숭이가 되는 것이 마음 편했다.(물론 대학을 다니는 과정에서 모든 수업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1학년 때 듣는 개론 수업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살기를 몇 년이 흘렀다. 공교롭게도 나에게 다시 '왜'를 생각하게 일깨워준 것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개발자로 근무하고 있는 지인이었다. 우아한테크코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지인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고 돌아오는 답은 거의 늘 같았다. '왜 그래야 되는데?' 이미 사고하기를 멈춰버린 나인지라, 처음에는 그런 질문들에 대답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친구가 나를 골탕 먹이고 괴롭히려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결국 내가 처음 왜를 고민했을 때와 같았다. '이 결과의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어디에서 잘못이 생겼는지가 필연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애초부터 왜 이런 객체가 필요할까. 왜 이런 기능을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프로그래밍을 진행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인텔리제이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겨서 에러가 났는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 생각의 과정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체화하고 나면, 다음 프로그래밍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필요한 객체와 기능이 보인다.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요약하자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왜'를 생각하면, 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것에 대한 결과다. 애초부터 깊이 고민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 결과가 잘못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행여나 잘못된 결과를 야기해도 어느 부분에서 잘못되어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지를 빠르게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우리 사회는 빨리빨리 무언가 결과를 도출해 내기를 바란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이라는 환경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는 절대불변의 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유에 대한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며 동시에 근본적인 탐구를 통한 깨달음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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